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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_methods_lecture_note [2018/03/07 08:08] hkimscilresearch_methods_lecture_note [2019/03/20 09:02] hkims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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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플라톤의 예로는 아직,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란 무엇이며, 이론이 방법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되지 않지만, 철학적인 접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강의 예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위의 플라톤의 예로는 아직,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란 무엇이며, 이론이 방법론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되지 않지만, 철학적인 접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강의 예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경험주의([[wp>Empiricism]])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중고등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주의가 17세기 영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것이다. 적어도 "섬나라의 (영국) 경험주의와 대륙의 이성주의"라는 문구는 기억하고 있을 독자들는, 이 주의(-ism)가 흄 ([[wp>David_Hume|Hume, David]]), 로크 ([[wp>John_Locke|Locke. John]]) 등의 학자에 의해서 주창되었으며, 현재 유럽, 북미의 백인 계열의 나라가 다른 인종에 (적어도 물질의 풍요에 한해서는) 비해서 앞서 가도록 도운 두 개의 커다란 사조라고 (철학) 배웠을 것이다. 앵글로 색슨 계열의 국가가 앞서 가게 된 이유로는 (이성주의와 함께) 경험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과학의 발전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즉, 경험주의는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일종의 철학 사조이다. +다음은 [[:Empiricism|경험주의]]([[wp>Empiricism]])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의 중고등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주의가 17세기 영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것이다. 적어도 "섬나라의 (영국) 경험주의와 대륙의 이성주의"라는 문구는 기억하고 있을 독자들는, 이 주의(-ism)가 흄 ([[wp>David_Hume|Hume, David]]), 로크 ([[wp>John_Locke|Locke. John]]) 등의 학자에 의해서 주창되었으며, 현재 유럽, 북미의 백인 계열의 나라가 다른 인종에 (적어도 물질의 풍요에 한해서는) 비해서 앞서 가도록 도운 두 개의 커다란 사조라고 (철학) 배웠을 것이다. 앵글로 색슨 계열의 국가가 앞서 가게 된 이유로는 (이성주의와 함께) 경험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과학의 발전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즉, 경험주의는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일종의 철학 사조이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지식은 (인간이 안다는 것) 오직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경험적 지식은 결국 인간이 5감을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통해서 얻는 경험으로 알게된 것들이 지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도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 (objects) 또한 경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경험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의 두뇌로 (mind) 태어나서, 오직 경험을 통해서 (후에는 이에 더하여 경험과 경험을 잇는 논리를 통해서) 지식을 쌓게 된다. [[wp>Tabula_rasa]]란 바로 이와 같은 백지장의 두뇌로 (mind) 태어난 상태를 말한다.  경험주의는 인간의 지식은 (인간이 안다는 것) 오직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경험적 지식은 결국 인간이 5감을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통해서 얻는 경험으로 알게된 것들이 지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도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 (objects) 또한 경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경험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백지와 같은 상태의 두뇌로 (mind) 태어나서, 오직 경험을 통해서 (후에는 이에 더하여 경험과 경험을 잇는 논리를 통해서) 지식을 쌓게 된다. [[wp>Tabula_rasa]]란 바로 이와 같은 백지장의 두뇌로 (mind) 태어난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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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은 이렇다. 필자가 "책상"에 대한 환기를 한 직 후에 독자의 머리에는 "책상"이라는 것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머리에 떠오른 책상은 바로 눈앞의 독서에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책상인가? 아니면, 독자가 다른 시간대에 사용하는, 아파트에 있는 바로 그 "책상"인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아니면, 중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무수히 많은 문학 작품을 읽는데 사용되었던 그 "책상"인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이도 아니면, 바로 그 책상을 보면, 독자가 일생 동안 경험했던 모든 책상이 머리에 연속적으로 떠오르는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머리에 떠오른 책상은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독자가 방금 본 책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은 이렇다. 필자가 "책상"에 대한 환기를 한 직 후에 독자의 머리에는 "책상"이라는 것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머리에 떠오른 책상은 바로 눈앞의 독서에 사용되고 있는 바로 "그" 책상인가? 아니면, 독자가 다른 시간대에 사용하는, 아파트에 있는 바로 그 "책상"인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아니면, 중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무수히 많은 문학 작품을 읽는데 사용되었던 그 "책상"인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이도 아니면, 바로 그 책상을 보면, 독자가 일생 동안 경험했던 모든 책상이 머리에 연속적으로 떠오르는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의 머리에 떠오른 책상은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독자가 방금 본 책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wp>Edmund_Husserl|Husserl]]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철학의 "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암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Phenomenology) 시작이다.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후에 Schutz, Garfinkel, Goffman 등에게 영향을 미쳐서 사회학에 대한 연구에도 널리 응용되게 되었다.+[[wp>Edmund_Husserl|Husserl]]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철학의 "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암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상학의 (Phenomenology) 시작이다.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후에 Schutz (([[wp>Alfred_Schütz]])), Garfinkel, Goffman 등에게 영향을 미쳐서 사회학에 대한 연구에도 널리 응용되게 되었다.
  
 일단, 내가 경험하는 책상과 내 머리 속의 그것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경험론자가 주장하는 경험적 지식이 그리 확고하지만은 않다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독자가 경험하는 그 책상을 다른 사람이 경험한다면 동일한 것을 경험하는 것일까? 이 또한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상을 보는 위치는 내가 점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일한 물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나의 위치에서 본다면 동일한 물체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생활에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항상 상대가 경험하는 것과 내가 경험하는 것이 일치하는가 비교 확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내가 경험하는 것과 상대가 경험하는 것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그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시한 후에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무시하는 태도를 "당연지사적인 태도 (taken-for-granted mannor)"라고 한다. 이와 같은 "당연지사"적인 태도는 일상 생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늘 나타난다. 단지 우리가 확인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래는 두 가족 구성원 사이의 대화이다. 일단, 내가 경험하는 책상과 내 머리 속의 그것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경험론자가 주장하는 경험적 지식이 그리 확고하지만은 않다고 알려준다. 그렇다면, 독자가 경험하는 그 책상을 다른 사람이 경험한다면 동일한 것을 경험하는 것일까? 이 또한 사실은 그렇지 않다. 책상을 보는 위치는 내가 점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일한 물체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나의 위치에서 본다면 동일한 물체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생활에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항상 상대가 경험하는 것과 내가 경험하는 것이 일치하는가 비교 확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내가 경험하는 것과 상대가 경험하는 것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그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시한 후에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무시하는 태도를 "당연지사적인 태도 (taken-for-granted mannor)"라고 한다. 이와 같은 "당연지사"적인 태도는 일상 생활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늘 나타난다. 단지 우리가 확인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래는 두 가족 구성원 사이의 대화이다.
research_methods_lecture_note.txt · Last modified: 2021/04/10 17:34 by hkims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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