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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http://yeoksa.blog.fc2.com/

안병직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은 1980년대 전반까지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입장에서 한국 경제를 비판해온 좌파 진영의 대표학자. 그러나 1985년 저개발국이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토대로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중진자본주의론’을 접하고 이른바 ‘캐치-업 이론’을 주창하면서,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긍정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사상전환을 했다. 그의 새로운 한국 경제사 연구는 1987년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설립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본격화됐다. 2006년 뉴라이트재단을 창립, 초대 이사장을 맡았고, 지금은 사단법인 ‘시대정신’ 이사장과 경기도가 설립한 실학박물관 초대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보길사장과 이진우편집국장이 인터뷰했고, 이를 정리-재구성했다. <편집자 주>

—–대표적 좌파학자에서 어떻게 해서 생각을 바꾸게 되셨습니까?

85년 3월 동경대에 간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경대에 간 것은, 세계사가 점점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84년 말에 일본학자 나까무라 사토루가 ”이제 사회주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 시대가 다시 열린다“ 중진자본주의론을 내놓았습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들어온 ‘역사평론’이라는 잡지에서 그걸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3세계 연구자로서 세계적 1인자인 모리따 기리로 동경대교수를 만나서 의논해보니 ”일본에서 제3세계론을 만나려면 세 사람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그들 모두 만났는데, ‘중진자본주의론’을 쓴 나까무라 사토루가 가장 확실하더군요. 그는 사회주의가 더 이상 유지가 안되고, 1960년부터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가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우리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신흥공업국(NICs)들이 자본주의를 선도하게 된다는 것을 통계분석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연구자들이 동경대학에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러시아, 중국 등에서 많이 와있었고, 정보수집 차원에서 위험에 개의치 않고 조총련을 통해 북한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저는 내가 권위주의 국가에서 와서 가장 뒤쳐져있고 그 사람들이 앞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주의 국가 출신 학자들을 만나보니 이론적으로 오히려 제게 상대가 안되더라고요. 심지어는 마르크스 이론과 모택동 이론으로 토론해도 아예 게임이 안되더라고요. 모택동 어록만 읽었지 모택동이 집대성한 이론은 모르더라고요. 그리고 행동양식이 너무도 촌스럽더라고요. 거기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나까무라 사토루가 사회주의 시대가 끝났다고 이야기하는지 그제서야 알겠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눈을 씻고 한국경제를 보니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6년에 한국에서 무역적자가 무역흑자로 바뀌었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1986년에 흑자가 되기까지 110년 동안 한국 무역이 흑자가 된 해는 단 2년 밖에 없었습니다. 1924년과 1925년입니다. 1876년부터 한 3년간은 무역통계가 집계가 잘 되지 않아서 흑자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실제는 알 수 없습니다.
1986년의 무역흑자를 보면서 ”한국경제의 체질이 변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진자본주의론’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한국경제가 안될 경제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비로소 한국경제가 자본주의로서 되는 경제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선생님에게선 자기 전 인생을 걸고 학문을 하고 사상을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의 사상은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닙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 근대사회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이념과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상 자체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생활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게 궁극적인 목적이고 이념이나 사상이나 학문이나 모두 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사회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국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국 사람들이 행복이 담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근본적인 동기이기 때문에 이념이나 학문이나 사상이나 그 위에 있는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히 요새 김정일에 대해 굉장히 큰 불만을 품고 북한인권 운동을 하는데, 역시 중요한 것은 북한 2,800만 인민들의 생활, 그 사람들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지, 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체제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종교를 위한 종교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무종교인 것처럼, 지금도 학문을 대하거나 사상을 대하거나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뭐냐, 학문적인 정의를 하라”고 물어본다면, 그건 할 수가 없습니다.
80년대 한국경제가 흑자 내면서 가다가 90년대 IMF 외환위기가 오자 좌파들은 “그것 봐라! 이제 한국경제가 몰락한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국제 금융위기가 오니까 다시 “자본주의가 모순에 따라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그런 가설에 기대를 걸고 있는 세력들도 우리 사회에 꽤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역사를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본주의의 불가역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된 사회는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세계사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한번 자본주의가 된 국가가 다시 자본주의 이전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지요. 자본주의화 되었던 국가를 더 발전시킨다고 공산주의를 해서 시장경제를 없앤다면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자본주의화한 국가라는 것이 결국 시장경제를 한다는 것인데, 시장경제가 된 국가는 절대로 시장경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붕괴될 수는 있지만, 시장경제는 붕괴될 수 없습니다. 시장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국제 금융시장, 주식시장 등은 엄청나게 복잡한 제도적 보완을 겪어야만 합니다. 제도개혁은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시장 자체를 없앤다는 것을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지난 번 미네르바 사태에서 보듯 익명을 내세운 사람이 ‘리만 브라더스’ 파산을 예언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온 국민의 집단적 쏠림 현상이 빚어졌는데, 그 때 우리 경제학계에선 이를 제대로 짚어주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너무도 갑자기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사회의 변화를 못 따라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 자본주의는 400년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들을 대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도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최소한 150년은 되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리와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본주의 사회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를 불과 50년 만에 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서 경제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그냥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빨리 성장한 부작용이지요. 근대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적 이해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높아지기 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서 좌파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저는 원래 국문학과에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가난한데 국문학 해서 어떻게 먹고 사냐며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상과대학에 갔습니다. 그리고 관료가 되려 했습니다. 제가 1957년 조금 늦게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는 대체로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침에 학교 나가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었습니다. 고시를 해서 관료를 하면 먹고 살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4.19가 났습니다. 당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후배들이 국가사회에 중요한 일이 있는데 공부만 해서 되겠느냐 해서 나갔습니다. 그게 사회에 대해 눈 뜨는 계기가 되었지요. 4.19뒤 급속하게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사회문제에 눈을 떴습니다. 한국사회가 과연 어디로 가야 되는 지에 대한 토론이 치열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느낀 것이, 한국 사회가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알아야 되겠다, 관리가 되어서는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대학원에 진학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입학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곤란했는데, 얼마 후 형님 두 분이 삼성물산과 농협에 취직했기에 공부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64년에 대학원에 가면서 한국경제사를 공부하게 되고, 또 자연히 학생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4.19후에 학생운동이 급격하게 고조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직접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고, 후진국경제학회를 만들어 학부학생들을 모아 공부를 지도하였습니다. 아무래도 학생운동은 사회에 대해 저항적이다 보니, 한국 근대사 가운데서 독립운동사, 노동운동사 등 도 좌익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만해 한용운 선생 사상과 단재 신채호 선생 사상을 공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주의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한국경제가 자본주의로 나가서는 자립 국가가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제국주의 열강에 종속된 식민지 국가 밖에는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의 사조로서는 그런 것이 팽배했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길이 무엇이냐?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은, 이는 곧 자본주의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국이 자주 독립국가로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65년에 서울대학교 전임이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등에 대해 더욱 연구하다 보니, 70년대 말에 한국경제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박정희 정권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10.26이 났을 때 우리의 역사인식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운동과 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전두환 쿠데타 정권 역시도 곧 무너지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무너지리라 예상했던 한국경제가 건재했습니다. 거기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생각이 틀린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저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교수 68명이 전두환 시절 80년대 9월에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 저인데, 이상하게도 저와 백낙청씨만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 그렇죠?

왜 그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저도 붙잡혀 갔는데, 그 때 중앙정보부 친구들이 “당신 같은 사람은 반대운동을 해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80년 초에 학생들이 학교를 공격하는 거를 제가 나가서 다 막았거든요. 우리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하는데 이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 때 그런 것들이 중앙정보부에 보고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마도 사회가 위험한 상황이 되면 굉장히 쓸모 있는 인간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사실상 당시 361인 교수선언을 주도했는데 김진균 선생이 한 거로 조사됐습니다. 당시 저는 연설을 하러 가야 돼서 인쇄물 프린트를 김진균 선생보고 하라고 한 게 이유였습니다. 백낙청씨는 중앙정보부 감시가 심해 굉장히 조심하는 상황이었고요.
마침 그 때 그 때 제 이름이 국제적으로 꽤 알려진 상황이어서 동경대학에 와서 가르치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외국에 유학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고 싶었지만, 해직된 분들을 뒷바라지 해야 될 처지였기에 거절했습니다. 내가 가면 사람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돈도 거두고, 함께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다행스럽게도 84년 가을 학기에 복직되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동경대에 가도 좋겠냐고 했더니 “당신 고생 많이 했는데 그러라”고 해서 가게 됐습니.

—–동경대에 갔다 오자마자 낙성대연구소를 만드셨죠? 이영훈 선생 팀과 말이죠?

제가 일본에 다녀와서 87년 낙성대연구소를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에 수중에 돈이 좀 생겼어요. 이대원교수와 내가 부동산 투자를 한 게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몇 십 배로 뛰었기에 이를 팔자고 했습니다. 이교수에게 “이것 말이야, 너와 내가 개인적으로 쓰면 죄받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같이 돈을 내자” 그렇게 해서 연구소가 만들어 졌습니다.
연구소를 만들 때 느낀 것은 이념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사람을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념이 과잉이라 과학이 산으로 가곤 합니다. 과학의 기초가 되는 것은 결국 통계입니다. 그래서 통계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장기 통계를 정리해서 진실을 밝히는 그런 움직임은 당시 일본에 이미 있었습니다.
한국 근대 100년의 통계의 흐름을 보면 큰 산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저히 안되리라고 생각했던 제3세계 자본주의의 성공은 엄청난 세계사적인 큰 흐름이기 때문에, 미시적 분석으로는 진리를 알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제1세계를 보는 눈과 제3세계를 보는 눈은 달라야 합니다. 역사적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제1세계 근대화 및 자본주의는 자생적으로, 내부로부터 경제발전의 동력이 나와서 서서히 성립하여 발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느냐고요? 세계 자본주의가 최초로 거기서 성립된 국가이니까요. 밖에서부터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것이 아니거든요. 16세기 중엽에 영국을 중심으로 대서양에서 자본주의가 성립할 때는 처음부터 자생적인 과정이거든요. 이를 경제사 이론 또는 역사이론으로는 자본주의 이행 이론이라고 해서, 어떻게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하는지 그것만 계속해서 연구했습니다.
김용섭 선생의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도 크게 보면 학술적으로 그와 동일한 흐름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일본 자본주의가 내생적으로만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된 것이 아니냐? 일본의 자본주의라는 것이 서양 사양산업이 일본으로 건너왔고 이를 일본이 효과적으로 수용했기에 가능한 것 아니냐”하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아까마쓰 가나미(赤松要)의 ‘안행형 경제발전론’인데, 기러기떼처럼 선발국이 먼저 가면 후발국이 선발국의 영향을 받아 이를 뒤따라 간다는 겁니다.
1960년대 한국과 같은 경제를 분석할 때에는 ‘캐치업 이론’이 대단히 유용합니다. 그 전에 거센 크론이 19세기 유럽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을 분석한 ‘후발성 이론’을 60년대에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일련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후발 자본주의일수록 선발 자본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캐치업 과정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낙성대연구소가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첫째, ‘캐치업 가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것 가지고 시비 걸면 이념 싸움밖에 안됩니다. 이 ‘캐치업 이론’을 토대로 100년간의 통계를 갖고 증명하니까 이를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통계라는 것이 1~2년 분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년 정도는 갖고 분석해야 하는데 이미 20년 넘게 이같은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국사회를 이념이 아닌 객관적 흐름을 갖고 보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분석할 때 이념을 배제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이념이 선행되어 객관적 사실을 왜곡하면,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내가 틀릴 수 있다고 회의를 가져본 적은 없으신지요?

그건 철학 인식론 문제입니다. 사회주의자로서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 철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절대적 인식이 가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물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다 해명할 수 있고, 본질에 접근할 수 있고, 그러기에 이에 대해서 회의를 가질 필요가 없고, 자연의 법칙처럼 역사의 법칙도 절대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가 이념이 강한 겁니다.
그러다 헤겔 철학을 버리고 칸트 철학으로 바꿨습니다. 인간의 인식은 상대적인 겁니다. 어떤 동상에 대해 사진을 찍는다면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컷 한 컷을 찍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도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회라는 것이 엄청나게 복잡한데 이를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원래 관찰이라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각도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것만 진리이고 다른 사람이 본 것은 진리가 아닙니까? 그것도 진리일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파악한 진리라는 것도 사실은 상대적인 겁니다. 다른 진리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죠. 바로 거기서 관용이라는 사상이 싹 트는 겁니다.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와 싸워서 이긴 이유는 자유주의가 항상 여유 있게 사고하니까 자기가 틀린 것을 계속해서 고치고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반성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굉장히 종교적인 인간이지만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종교에 귀의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를 안 가진다고 해서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386세대의 신념은 과연 종교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파고 들어야 하는데, 일단 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걸 재산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지키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가장 보수적인 겁니다.
그 사람들이 진보라고 말하지만, 인류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표현되는 집단이 가장 보수적입니다. 가장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진보적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사회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자야말로 끊임없이 변해갔습니다. 사회적 역사적 역동성을 죽이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입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이에 반대했습니다. 저 쪽이 진보라고 해서 우리도 같이 진보라고 하면 결국 패배합니다. 보수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면 절대로 진보에게 승리하지 못합니다. 보수가 진보에 비해 왜 가치가 있는지 국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보수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본래 진보고 보수란 일종의 고정적인 표현인데, 이 절대적 가치를 국민들에게 설득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인식시켜야 합니다.

—–기파랑에서 출판한 대담집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서문에서 “나의 학문적 업적이 빨리 썩어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그 업적이란 무엇을 말씀하신 건가요?

모든 학문적 업적은 상대적이고 불안정합니다. 절대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연구, 사상, 이념 모두 절대적인 진리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깨지지 않는 이상, 인류가 더 이상 행복한 경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깨지면서 새로운 진리들이 계속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저개발국 상황에서의 ‘캐치업 가설’이라든지 과학적 통계정리라든지,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가설들을 갖고 당분간 노력해야 하지만,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사회가 빨리 되어야 선진국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옳은 상황이 되면, 한국은 계속 과도기 상황에 있는 겁니다.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70년대와 80년대 전반기까지 가장 중요한 연구라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한국 민족주의 연구’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학적 연구들이 좀 있습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중진자본주의론’을 필두로 해서 ‘캐치업 이론’을 폈습니다. 그런 것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글을 썼죠.

—–아직도 게으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눈을 어떻게 뜨게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이 핵심입니다. 8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사회가 자생적 내재적으로 민족주의가 발전하고 외세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한국을 못살게 하는 존재란 생각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그것이 사상의 중심이 되었는데, 한국의 노동운동, 민족운동, 민주화운동 모두가 그러한 가설에 입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오히려 선진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고도성장을 하고, 고도성장을 통해 국력이 배양되니까 자주성이 더 배양이 되고, 그러면서 한국사회에 자유가 부여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인식 없이 절대로 사상 전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사상 형성이라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들은 생활인입니다. 자기 생활이 무엇에 의해 지탱되는지 그 근본을 알면, 자기 사상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네 월급을 받는다, 만일 북쪽에 있다면 네 생활이 어떻게 되었겠냐, 그렇게 물어보는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 생활을 반성할 수 있도록 자꾸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는 틀로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분석해 오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글로 공부해온 많은 학생들이 거기 머물러서 더 이상 교정이 안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인간이 사고의 틀을 깬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인간관계를 모두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죽음의 구렁텅이를 들어갔다 나오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가능합니다. 연옥을 통과해야 하는 거죠. 그것도 자기 스스로 해야만 합니다. 한 알의 밀이 썩어야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사상적 전향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되지 않습니다. 이념적 충격만 갖고는 안되며, 자기 생활에 대한 반성을 통해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종교나 진리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문득 깨닫는 것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단순한 논리로는 안됩니다. 생활을 통해 이루어져야지, 단순한 이론으로는 안됩니다.

—–선생님 세대가 만들어 놓은 변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순 없을까요?

처음에 제가 일본에서 돌아와서 개별적으로 제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보니까 도저히 불가능하더군요.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종래 우리가 운동할 때 표현처럼 그럴 때에는 사상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상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사상투쟁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진자본주의론을 쓰고 사회주의론에 대해 계속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도 우파에 속했다고 해서 좌파 사람들과 이야기를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 사람들이 틀렸는가를 계속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증명이 되도록, 생활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김문수경기지사를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제자인 그에게 “자네, 지금까지는 노동자가 자네를 필요로 했겠지만, 지금부터는 자네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네”라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제 성숙해서 자네와 같은 지식인들은 필요 없어졌네. 곧 아웃될 거야” 그랬습니다. 그가 감옥 갔다 나와서 다시 접촉하니까 벌써 이미 노동자들이 성장해서 그가 필요가 없어졌죠. 그러자 그는 1년 후에 찾아와서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하더라고요. 그 이후 완전히 변하기까지 7~8년이나 따라다니면서 설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천사태를 겪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는 변했습니다.
제가 그래도 행복한 것은 학문적인 제자들은 다 1년 만에 변했어요. 그런데 사상투쟁을 하는 사람은 5~10년 걸렸어요. 제가 따라다니면서 설득 한 것은 제게 원죄가 있으니까요. 역시 시간을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식민지 반봉건경제론’과 함께 386세대를 사로잡은 것이 박현채 선생이 주장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론’이라는 틀로 우리 사회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박현채 선생이 쓴 ‘민족경제론’은 386세대의 필독서였지요. 그런데 박현채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이론을 결국 수정하지 않았죠? 그런데 조정래씨의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모델이 박현채 선생인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맞나요?

사실 조정래씨 소설에 나오는 것은 대개 허구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박현채 선생의 과장된 말을 듣고 쓴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정래씨에게 너무 타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조정래씨가 저에게 거짓말 못하는 것이 저와 박현채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이야기 들었으니까요. 그 때가 70~80년대였는데 박현채 선생과 사상적으로는 달랐지만 인간적으로는 틀어진 적은 없습니다.
박현채 선생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이나 ‘신식민지 반봉건 이론’이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겁니다. 두 개 다 모두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족모순을 우선시키는 이유가 식민지라는 개념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절대 식민지라는 것을 넣어서 민족모순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모택동이 식민지라는 개념과 계급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갖고 식민지론을 분석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붕괴된 것입니다. 이원론은 성립이 되지 않거든요.
그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잘 몰랐는데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이론이 붕괴되는 이유는 자본주의 이론과 식민지 이론을 결합시킬 방법이 없거든요. 거기에서 백낙청씨의 분단체제론이 성립 안한다는 것도 제가 증명했지요.
여러 체제가 종합되는 그런 체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이 체제면 이 체제고 저 체제면 저 체제지, 여러 체제를 다 종합해서 분단체제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백낙청씨가 제 비판에 대해 대답을 못했습니다. 자신이 비양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학자라면 틀렸다고 말하든지 반박하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되거든요.
기본적으로는 그 이론이 문제가 아니고요, ‘신식민지 반봉건론’이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나 이론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고, 그게 다 사실은 모택동 이론이었던 것입니다.

—–안병직 선생과 박현채 선생이 주창하신 이론들이, 그리고 태백산맥이라는 소설 속에 미화된 그런 이념들이 아직도 일부에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는 종북주의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진보신당은 종북주의가 싫어서 떨어져 나왔고, 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들입니다. 지금은 종북주의자도 많지 않고, 마르크스-레닌 주의자도 소수입니다. 그런 이론에 대해서 동조적이고 자기 소신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게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대한민국이 제1세계 선진자본주의처럼 자생적으로 자주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캐치업’을 통해 발전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 속에 부끄러운 부분이 굉장히 많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한미동맹, 권위주의 정권 등을 거치며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캐치업 이론’은 제3세계 국가는 그렇게 밖에는 근대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선진자본주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모두 성취해 버린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엄청나게 정의가 패배하고 부정의가 승리한 그런 역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고 현상에 불과합니다. 본질은 그런 속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어떤 사회도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속도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계속적으로 공급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이 아닌, 이런 긍정적인 요소를 계속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제3세계는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부끄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새로운 발전된 사회를 만드는 대단히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뉴라이트 사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식민지 과정에서 아무 것도 없었는데, 경제적으로 발전된 것도 없고, 사상적으로 발전된 것도 없는데, 어떻게 48년에 제헌헌법을 만들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느냐? 바로 이 문제거든요. 세계의 어떤 국가가 경제발전도 안됐고, 근대 교육도 없었는데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국가로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승만이 40년간 미국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고, 그런 사회를 백업해줄 수 있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후진적이었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되느냐? 그것은 수출입국이라는 그런 과정 때문에 가능하고, 수출입국을 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권위주의를 했지요.
저와 이영훈씨를 표적으로 매국노라고 매도하는 이유는 저희들이 가장 자기들의 적이거든요. 사상적으로요. 이렇게 적나라하게 설명을 해버리니까요.

—–김구선생이 집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집권을 못했을 겁니다. 그런 공상가가 집권할 수 없어요. 만약 했다면 당시에 좌우합작이라는 것은 결국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아무런 가능성이 없었어요. 결국 한국 자본주의라는 것이 내부에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하고 경제발전을 하고 했지만, 외부적으로 한미동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인정을 안하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역사가 이상하게 변하는 겁니다. 한미동맹이 있어서 한국전쟁을 거쳐 70만 군대를 양성했기 때문에, 근대화의 원동력이 생긴 겁니다. 70만 군대가 생겨서 그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단순한 군대가 아니고 미국식으로 전부 다 훈련된 그런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60~70년대 경제개발이 가능했던 거에요. 그런 과정을 다 빼고 쿠데타는 싫지만 경제성장은 좋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살은 빼고 뼈만 갖고 이야기하면 안되잖아요. 살이 없고 뼈만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이 지금 제대로 된 국가가 되려면 대한민국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정당하게 성립한 국가인지를 제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대안교과서 같은 것을 만든 겁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정당화하고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을 근거로 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해줄 사회가 어디 또 따로 있습니까?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그런 사회를 다시 만들려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이상의 고통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스럽고 행복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초로 해야 하는지, 그 출발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거는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행복을 누가 담보해주느냐,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느냐, 그것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정당하든 부정하든 상관이 없는 겁니다. 어떤 국가와 사회적 배경 속에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를 지금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을 10년 하셨다고 하는데, 변혁운동에 대한 지금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노동운동을 직접 한 적은 없고, 지도만 했습니다. 그 때에는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가 운동의 주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노동운동을 하라고 했지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의 가장 중추적인 세력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위장취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론이 바뀌어서 일반 프롤레타리아는 시야가 국한되기 때문에, 레닌의 ‘전위당 이론’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전위당은 뿌띠 부르주아 중심입니다. 이게 공산주의 이론의 모순이기는 한데, 뿌띠 부르조아여야만이 전체적인 그림을 본다는 겁니다. 레닌, 스탈린, 모택동 다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뿌띠 부르조아였구요. 본래는 노동계급이 혁명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가 그렇지 않다 보니까, 그것이 콤플렉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 끊임없이 고민해왔지만, 결과적으로 단 한 번도 역사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이론과 현실이 달랐던 거지요.

—–현재의 경제위기가 장기화되면 젊은 청년층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에 가세하여 더 많이 늘어나지는 않을까요?

미국 주택경기 후퇴를 계기로 해서 발생한 경제위기의 심각도가 1929년 세계대공황의 충격과 비슷하게 다가온다고 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엄청난 대량실업이 있었습니다. 30~40% 정도의 실업률이 있었고, 국민소득이 갑자기 축소되어 반 토막 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929년과 같은 충격이라고 하면서도, 실업이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 때만큼 높지는 않습니다. 국민소득 또한 조금씩 감소되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많이 축소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공황 이후 경제학 이론이 대단히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보통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종래 경제학이라는 것이 소득이론과 가격이론이었는데, 그 후 게임이론이라는 것이 나오면서 제도경제학과 복지경제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30년 전 경제학과 지금 경제학은 비교 자체가 안된지요. 이제는 정말 사회 구석구석까지 경제학이 모두 분석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가 전망하기에는 올 상반기 혹은 하반기까지는 어렵겠지만, 곧 회복될 것으로 봅니다. 미국 가이트너 재무장관의 처방을 보면,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결국 부실채권을 어떻게 정리하고, 죽은 주택경기를 어떻게 살릴 거냐가 관건인데, 바로 처방이 그 점을 조준하고 있거든요. 미국에서 부실채권 정리가 시작된다니까 미국경제가 조금 꿈틀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각국이 저렇게 대응하기 시작한다면, 세계경기가 올 하반기부터 회복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에 경기가 계속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한국사회가 굉장히 불안정해질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해하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인정해서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절대적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의해 혜택을 받은 사회적 계층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누렸던 성과에 대해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거든요. 그런 계층이 많아졌습니다. 자신들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인식하든 아니든 간에, 그 계층 자체는 많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업이 너무 발전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려면 기업을 부정해야 하는데, 어떤 정권이라도 이들을 무시하는 경제정책을 펼 수 있겠습니까? 만일 김정일이 남한을 먹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것은 김정일이 정치적으로는 먹을 수 있겠지만 경제적으로는 기업과 시장에게 먹힐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김정일이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는다면, 기업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한국이 부딪힌 어려움에 대해 초조함을 느끼지 않고 장기적인 시야를 갖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저는 뉴라이트 쪽에 이야기합니다. 좌파가 집권하더라도 조금 삐딱해질 뿐 근본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주니까 뉴라이트에 대한 한국사회의 여론이 바뀌더군요. 한국사회가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비판을 많이 받으셨는데,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십시오.

딱 한가지만 제가 거꾸로 물어봅시다. 식민지 이전에 중국보다 한국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뒤떨어져있었지요. 그런데 식민지 이후는 한국이 중국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앞섰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이든 비근대화론이든 다 괜찮습니다. 어쨌든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본질적인 변화를 우리가 아닌 일본인들이 가져왔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변화는 변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변화했다는 것인데, 자꾸 다른 이야기를 들이대면서 이를 부정해선 안됩니다. 사족이 몸뚱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분명한 것은 조선후기 상품경제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억압과 지배를 받은 것이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본다면 일본은 한반도가 세계적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 일종의 촉수일 뿐입니다.

—–결국 글로벌 관점이냐, 아니면 민족주의 관점이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더 심한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스스로 파괴한 민족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식민지 시절의 약탈도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거래였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만 집착하여, 우리의 유산과 유물을 시장에 내다 판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나마 일본인들이 이를 사갔고 보존했기에 그 시절의 유산과 유물이 그나마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식민지 시절에 파괴된 비율은 10%에 불과하고 90%는 우리 스스로가 내버리고 팔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라는 것이 자존심과 감성으로 이야기할 것이 못됩니다. 국민 계몽교육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자본과 기술의 축적이 언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나요? 식민지 시절을 거치고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건국이 이루어지면서 처음으로 근대화의 싹이 뿌려진 것 아닌가요? 그리고 그것을 박정희가 완성한 것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근대화 과정 없이는 경제발전이 불가능한데, 이승만도 부정하고, 박정희도 부정하고, 식민지도 부정한다면, 근대화와 경제성장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된지요.
어찌 보면 박정희가 너무 쉽게 잘 살게 해주다 보니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들이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출처 : [뉴데일리]“박정희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 아직 정신 못 차려”
“일제강점기 토지수탈 없었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없다.”
Category : 【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Tag : 토지수탈 위안부 동영상
——-“일제강점기, 공공연한 토지수탈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공공연한 토지수탈은 없었다. 그것은 저희들이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토지조사부'라든지 '분쟁지 자료'라든지 '지적도'라든지 그것을 10년간의 걸쳐서 대폭 검토를 했다.
기본적으로 말씀드리면 공공연한 토지수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국 각지에 지금 남아 있는 '토지조사부'라든지 '지적도'라든지 '분쟁지 자료'가 있다. 그 자료를 갖다 검토해보면 주로 분쟁지라는 게 토지수탈의 가능성이 있는 항목인데, 이 분쟁지 중에는 민유지에 대한 분쟁지는 극히 소수고 국유지에 대한 분쟁이 많다.
당시에 조선인들은 토지소유의식이 엄청나게 발전돼 있기 때문에 '네 토지냐, 내 토지냐'에 대해서 애매하게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민사재판까지 간 토지소유관계의 재판은 단 두 건밖에 없다. 이 점을 우리가 아직 연구를 안 해 가지고 안 밝혀져서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이 어수룩하게 분쟁지에 대해서 재판을 안 했겠냐. 재판이 된 게 단 두건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된다.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없다.”
위안부를 강제동원 했다는 일부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다. 그러나 한국이고 일본이고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발적 위안부, 그것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
위안부 문제의 초점은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걸 부정하는 사람 누구도 없다.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냐 안 했냐' 이 문제.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제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딸을 (위안부로) 보내지 않았고 어려운 사람들만 보냈다, 따라서 이것은 어느 정도의 자발성도 있을 수 있다.그것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

안병직.txt · Last modified: 2019/08/09 01:28 by hkims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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